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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손문과 리홍장의 “량광독립” 밀모
2017년 01월 09일 08시 54분  조회:3810  추천:16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6)

김문학

손문과 리홍장의 “량광독립” 밀모

 
  《국부년보초고》를 보면 1894년 6월 손중산은 “륙호동(陸皓東)을 데리고 리홍장에게 상서(上書)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국민당계렬의 손문전기에서 손문이 리홍장을 만나 직접 상서하는 이야기는 늘 등장하는 고정메뉴이다. 리홍장에게 “공상업발전, 교육제도개혁, 인재선발제도의 개혁 등 리상적인 플랭을 제기했다”고 하면서 리홍장이 “자네는 관화(북경어)도 모르는데 어찌 관리가 될수 있냐?”고 핀잔을 주며 지극히 랭담했다는 일화를 전하고있다. 이에 실망한 손문이 자체로 혁명조직을 무어 혁명에 투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만의 대표적인 문호, 문명비평가 리오(李敖)의 《손중산연구》에 따르면 이런 일화는 국민당이 손문을 미화하기 위한 날조라고 고증하고있다.
  이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1900년 손문과 리홍장이 련합하여 량광(兩廣)독립을 도모했다는 력사사실은 확실히 실재했다. 지금 국내 사학자들이 밝힌 자료에 의해 필자도 이를 알게 되였다.
 
  손문은 근대 중국의 국부로 불릴만큼 민주혁명의 대선구자이며 리홍장은 청말 원로중신으로서 당시 비스마르크,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세계 3대 제상”이라 불린 대정치가, 외교가였다.
 
  손문과 리홍장, 이 서로 상이한 정치가들이 어떤 현묘한 관계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근대사의 관심사가 아닐수 없다. 필자가 섭렵한 근대사자료를 종합하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량자 사이에는 확실히 량광을 청나라에서 독립시키고자 했던 움직임이 있었던것은 사실이다.
 
  시간적으로 보아 “량광독립”을 꾀한것은 의화단봉기와 때를 같이해 련쇄작용으로 8국련합군이 침공, 청나라정부가 대단히 약체화된 시기였다.
 
  때는 바로 1900년이다. 일청전쟁의 패북으로 굴욕적인 “마관조약” 체결로 “매국노”로 지탄당한 리홍장은 실의에 빠진 몇년을 이겨내고 서태후의 중용으로 다시금 량광총독으로 발탁된다. 동산재기를 이룬 그는  서태후의 지시로 강(康)ㅡ량(梁)의 유신당을 탄압하는 중임을 맡은것이다.
 
  그런데 리홍장은 강ㅡ량의 조상의 묘를 파헤치는 한편 암암리에는 강, 량과 간접적 거래를 하고 서신래왕도 했다. 관계는 참으로 기묘했다.
 
  의화단운동의 발발로 말미암아 리홍장과 혁명당 손문의 관계 또한 복잡, 미묘하게 되였다. 의화단의 운동으로 여지없이 란을 겪고있는 사회와 조정을 노린 손문은 찬스가 도래했다고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혁명무장봉기발동을 예정한 동시에 리홍장과 손잡고 리씨가 주도한 량광독립을 밀모했다.
 
  손문이 리홍장을 노린 리유는 무엇일가? 예로부터 그는 청정부에서 리홍장이 가장 개명하고 국제적 시야에 명석한 두뇌를 갖춘 예리한 정치가(또한 같은 한족)라고 판단하고 믿었기때문이였다. 따라서 리홍장에 대한 손문의 기대는 그만큼 지대했던것이다.
 
  한편 량광독립을 갈망하고 적극 추진한 세력은 향항에 사는 상류계층과 광동의 상류계층이였다. 북방의 동란이 량광과 향항지역으로 파급되면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리익에 해를 끼칠것이라고 판단했기에 리홍장을 리용하여 사회질서, 안전을 보전하고자 했던것이다.
 
  제임스의 《일본과 손일선》에 따르면 광동상인들은 2,500만냥 현금으로 리홍장의 북상을 막고 광동에 눌러앉게 하려했다.
 
 하계(河啓)라는 향항의 상층사회 인물은 향항총독인 블랙크와 연줄이 있었는데 그의 힘을 빌어 리홍장의 독립을 권유하였다. 우선 리홍장의 심복인 류학순(劉學詢)을 찾아 리홍장이 독립의향이 있다면 손문을 일본에서 불러오겠다고 했다.
 
  이 지극히 민감한 계책에 대해 리홍장은 말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하여 류씨가 즉시 손문에게 서한을 보내 리홍장이 북방의 의화단란으로 광동독립의향이 있으니 빨리 오라고 전했다.
 
  이들의 종용에 손문은 1900년 6월 11일, 일본인 미야자키 도텐과 정사량 등 조수 3명을 인솔하고 일본에서 출발하여 17일 향항에 도착했다. 혹시 리홍장이 자기를 꾀여 체포할것을 경계한 손문은 일본인 친구를 파견하여 류학순과 회담을 하게 하고 자신은 승선하여 윁남으로 왔다. 무장봉기를 준비하면서 한편 리홍장의 량광독립을 획책했다.
 
  그런데 6월 15일 청정부는 리홍장더러 “속히 북경으로 반환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리홍장은 경계하여 행동을 지연했다. 이때 북경으로 갔다가는 불길하다고 느꼈기때문이였다.
 
  드디여 6월 21일 청나라는 외국련합군과 선전포고를 했다. 리홍장과 함께 량광총독 류공일, 호광총독 장지동을 위주로 “동남호상보호”협의를 맺었다.
 
  7월 8일 성선회의 노력으로 리홍장은 원직회복으로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서태후가 재임명했다. 7월 16일 북상을 일부러 지체하던 리홍장은 광동을 떠났다.
 
  광주에서 북상의 경로로 꼭 향항을 경유하게 되였다. 아직 리홍장에 대한 독립합작의 뜻이 남아있는 손문과 블랙크는 리홍장에게 최후의 간청을 들려 했다.
 
  하루전날 향항해만에 도착한 손문은 리홍장과 면담을 기대했다. 그러나 향항당국은 영국정부의 지시에 따라 향항상륙을 거절했다. 단지 리홍장이 량광독립에 찬동한다면 손문의 상륙을 비준하고 면담을 허락할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이때의 리홍장은 광동, 향항의 리익보다 자신이 장악한 중국 전토의 국면에 더 관심했다. 따라서 손문과 밀약했던 광동, 광서 량광독립은 없던것처럼 포기하고말았다. 지어 손문을 체포할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리홍장은 손문의 혁명에 리해가 부족했던것이며 눈앞의 기득리익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이것이 손문에 비한 그의 약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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